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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태복경공파
뿌리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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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손및뿌리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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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좌랑 조시일 연보

페이지 정보

孤竹先生 작성일25-03-02 19:41 조회53회 댓글0건

본문

□ 예조좌랑 조시일(曺時逸) 연보

*1607년(선조40)생~1644년(인조22)졸

-조시일은 조석좌(曺錫佐, 1687~1727) 및 1728년(영조4) 무신혁명(戊申革命, 조성좌의 난) 조정좌·정임(曺鼎佐·鼎任)의 증조부임.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조시일 교지(敎旨)가 무려 20개가 소장돼 있음. 후손들이 소장(所藏)하지 못하고 이렇게 타인 소유로, 또 묶음으로 있는 걸 보면 1728년 무신혁명(戊申革命, 조성좌의 난) 후 합천 조문(曺門)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있었는가를 유추할 수 있음.

*아버지 창원부사 조정생(曺挺生), 백부 정주목사 조정립(曺挺立), 사촌형 양산군수 조시량(曺時亮) 교지는 한 장도 남아있지 않음.

-조시일(曺時逸, 증손: 조정좌·정임) 사위가 유학 이용빈(李龍賓)임. 이용빈은 예조판서 이무(李袤, 1600~1684)의 차남이고, 이무 아버지는 좌참찬 이경전(李慶全), 조부는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1539~1609)임. 이경전 사위가 경상감사·대사간 조수익(趙壽益, 1596~1674, 이용빈 고모부)인데, 그의 증손 조명규(趙命奎)와 현손 조상(趙鏛) 등이 1728년(영조4) 무신혁명에 대거 가담하여 조수익(趙壽益, 처조부: 권율 장군, 처고모부: 영의정 이항복)의 순창조씨는 몰락함. 조명규 동생 조일규(趙日奎)는 정배죄인 조행검(曺行儉,1720~1804, 조명좌 장남, 조시량<曺時亮, 사촌동생: 조시일> 현손)의 장인임.

-이용빈(李龍賓, 장인: 조시일, 고모부: 조수익) 형(兄)이 수찬 이인빈(李寅賓, 1625~1695)이며, 이인빈·용빈 외조부는 이조참판 유희발(柳希發)임. 유희발은 계해정변(인조반정) 직후 형님인 이조판서 유희분(柳希奮)과 함께 참수됨. 광해 처남인 유희분은 한성판관 조실구(曺實久, 1591~1658, 무신혁명 조세추 증조부)의 장인어른임.

-조시일 둘째동생인 조시수(曺時遂, 1607~1665)의 장인이 양원(梁榞, 1590~1650, 의령현감, 고모부: 정인홍)인데, 양원 아버지는 우계 성혼 문인으로 영의정 내암 정인홍과 척을 졌던 의금부도사 양홍주(梁弘澍, 1550~1610, 서울 거주, 부: 참판 양희, 큰자형: 영의정 정인홍)임.

*이 블로그 '이인좌 외증조인 영남 제일 부자 한성판관 조실구 묘소와 갈정승?' 참조: https://m.blog.naver.com/antlsguraud/221518330423 

1607년(선조40) 12월: 조시일은 합천군 도곡(陶谷: 묘산면 안성리)에서 도계 조정생(陶溪 曺挺生, 1585~1645)과 고령박씨(朴氏, 1586~1663, 박정번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함.

1629년(인조7) 11월 12일: 정시 병과 3인 중 3위로 급제함. (23세)

-앞서 1629년 7월에는 아버지 조정생(曺挺生, 좌랑)이 복권돼 평안도 어천도(魚川道) 찰방에 제수됨. 계해정변(1623년)이 일어난 뒤 조정생이 1618년(광해10) 1월 폐모 정청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파직됐었음.

-사촌 형인 조시량(曺時亮, 1603~1662, 증손: 조성좌·덕좌·명좌)은 33세 때인 1635년(인조13) 10월에 증광시 병과 33인 중 26위로 급제함.

*이 블로그 '양산군수 설주 조시량 연보' 참조: https://m.blog.naver.com/antlsguraud/220912824226

*조시일의 1629년 11월 12일 과거 급제를 축하하기 위해, 거창 남하면 양항리 살목마을의 고모(윤시남의 처 조씨·曺氏)가 1630년 2월에 노비와 전답을, 장모(윤정남의 처 심씨)가 1630년 3월 15일에 노비를 조시일에게 증여하는 별급명문(別給明文)이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돼 있음.

윤을신(尹乙臣, 형: 윤탕신) 세째 아들이 윤정남(尹挺男, 사위: 조시일)인데, 윤정남 바로 위 형님이 윤시남(尹時男, 1574~?, 감찰, 조응인 맏사위)임. 윤시남-창녕조씨 묘소는 묘산 화양동에 있음. 윤시남은 1608년(선조41) 1월 광해 등극에 공을 세워 1614년(광해6) 사용(司勇, 8품)으로 있을 때 정운원종공신(定運原從功臣錄, 1~3등 841명 책록) 1등(253명)에 책록되고 5년 후 1619년(광해11) 사헌부 감찰(監察, 정6품)에 임명됨.

윤탕신(尹湯臣, 증조: 윤자선)은 대구도호부사 조응인의 둘째 자형임. 윤삼빙(尹三聘, 부: 윤경, 조부: 윤자선) 4자(子)는 윤은신·이신·탕신·을신(尹殷臣·履臣·湯臣·乙臣)임.

단성현감 윤자선(尹孜善, 현손: 윤시남·정남) 8세(7대)윤자신(尹自莘, 고조: 윤이신, 부: 윤시룡)은 이웃 묘산면 도옥리 조성좌·정좌(曺聖佐·鼎佐)의 1728년(영조4) 3월 무신년 거의(擧義)에 가담하여 처형됨.

윤자선 장인은 칠곡 왜관 출생인 개령현감 이권(李惓, 1406~1472)인데, 이권밀양부사 완정 이언영(浣亭 李彦英, 1568~1639)의 5대(6세)조이고, 이언영 사위가 계해정변(1623년) 후 참수된 승지 박종주(朴宗冑, 조부: 박정완, 종조부: 박정번)와 1680년(숙종6) 경신환국 때 장살당한 이조판서 이원정(李元禎)임. 박종주 조부 박정완(朴廷琬, 장남: 장령 박광선, 장인: 조몽길)은 대구도호부사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 부: 조몽길, 손자: 조시량·시일, 6세손: 무신혁명 조정좌·성좌·덕좌·명좌)의 세째 자형임.

*또한 조시일의 어머니인 고령 우곡면 도진리 출생 고령박씨(박정번 딸, 박정완 조카)가 1650년(효종1) 9월 10일 며느리 윤씨(尹氏) 자녀, 즉 손자손녀(7명)에게 토지와 노비를 증여하는 별급명문(別給明文, 아래 이미지)도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돼 있음.

1630년(인조8) 9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 종9품) (24세)

1632년(인조10) 5월: 교서관 정자(正字, 정9품) (26세)

1632년(인조10) 7월: 승의랑(承議郞) 형조좌랑(刑曹佐郞, 정6품) (26세)

1633년(인조11) 2월: 승의랑 봉상시 주부(奉常寺 主簿, 종6품) (27세)

*1633년(인조11) 5월, 백부인 전 홍문관 교리 조정립(曺挺立, 조시량 아버지)이 사면·복권됨.

1634년(인조12) 2월: 승의랑(承議郞) 수(守) 전라도 도사(都事) 겸 춘추관 기주관(記注, 종5품) (28세)

1634년(인조12) 9월: 봉훈랑(奉訓郞, 종5품) 행(行) 형조좌랑(刑曹佐郞, 정6품)

◦1634년(인조12) 초 가을: ‘친목 겸 정치 결사체’인 동도회(同道會) 참여함.

*참여 인사 35명: 전 참봉 반학헌 김효선, 군자정 서계 정언굉, 사도정 매창 황상겸, 장흥봉사 한애 이의준, 부호군 망와 김영조, 전 군수 동고 박경범, 전 좌랑(佐郞, 정6품묵계 조희인(黙溪 曺希仁), 삼척부사(府使, 종3품) 상암 권준, 참례찰방 지천 민희안, 의령현감 심곡 김경조, 군기첨정 호계 여약, 전 정랑 화포 홍익한, 전 참봉 서강 성여훈, 생원 대암 최동집, 공조정랑(正郞, 정5품다포 이지화, 사산감역 학음 김염조, 전 좌랑 만취헌 김업, 수찬 한사 강대수, 진사 낙고 김요, 사재직장 태계 하진, 성균학유 소호 한극술, 공청도사 지암 도신수, 동몽교관 정사무, 주서(注書, 정7품용암 이상일, 생원 초당 박안복, 생원 박정시, 진사 사촌 김욱, 진사 서암 여효증, 생원 매헌 이유석, 한성참군 용계 서변, 진사 휘헌 도신여, 생원 부구당 김왕, 전라도사(都事, 종5품) 조시일(曺時逸), 장원별제 연천 조균, 훈련봉사 송호 심자광 등 35인임.

*위 사촌 김욱(沙村 金頊, 1602~1655, 조부: 동강 김우옹)은 유학 조한유(曺漢儒, 증조: 조시일)의 처증조임.

1634년(인조12) 12월: 봉훈랑 행 공청도 해미현감(종6품) 및 의금부도사 (28세)

1634년 12월 20일: 조봉대부(朝奉大夫, 종4품) 행(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28세)

1635년(인조13) 2월 13일∼8월: 종6품 공청도 도사(公淸道 都事) (29세)

-“조시일이 동성(同姓) 사촌 매부(妹夫)인 대구사람 유생(儒生) 이경(李璥)을 상피(相避: 멀리함)하지 않고 면천(沔川: 충남 당진) 사람이라 사칭하고 몰래 녹명(錄名: 과거 응시)을 도모하여 참방(參榜: 합격)시키려 한 죄”로 공청도사에서 파직됨. 그러나 창녕조씨 족보에는 이경(李璥)이 등재돼 있지 않음.

-이때 나주의 나숭대(羅崇大, 무신혁명 핵심 인물) 고조부인 사도시(司䆃寺) 정(正, 정3품) 나위소(羅緯素, 1582~1666)는 평이 좋지 않다고 하여 파직됨.

1637년(인조15) 4월: 53세인 조시일 부친 낭청(郎廳, 종6품) 조정생이 낙마(落馬)하여 중상을 입음.

*1637년에 임시 관직인 성균관 권지(權知)에 재직 중이던 조시일 사촌 형 조시량(曺時亮, 증손: 무신혁명 조성좌·덕좌·명좌·희좌)은, 1637년 1월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인 2월에 “남한산성에 군사와 양식이 적어 오래 지탱하기 어려웠다는 말을 퍼트려 군정(軍情)을 동요시키는 등 조정을 비난했다.”고 하여 1638년 4월~1639년 5월까지 극변 지역인 평북 강계로 정배(定配)됨.

*조선왕조실록(인조 16년 1638년 4월 10일)·승정원일기(인조 17년 1639년 5월 4일) 등에 의하면, 고령박씨(조시일 어머니) 5촌조카 박종윤(朴宗胤)“정인홍의 남은 무리들 중 한 사람으로, 병자호란(1636년) 때 합천 정옹(鄭滃, 부: 내암 4촌동생인 정인함, 서산정씨족보에 누락)의 집에서 정흡(鄭潝, 부: 정인함), 정기(鄭淇, 부: 정인함?, 족보에 누락), 정대용(鄭大容, 좌랑), 오익환(吳益煥, 전 수찬, 고령 쌍림 출생, 외조부모: 박정완-창녕조씨, 자형: 내암 손자 정릉), 박건갑(朴乾甲, 1558~1638?, 생원, 삼가현 토동 출생, 사돈: 오익환 종조부 오찬<吳澯, 1547~1609, 생원, 형: 오운, 사위: 박건갑 아들 생원 박규>) 등과 함께 술자리를 마련하여 축하했다. 모두 혼조(昏朝, 광해) 때 역신(逆臣)의 잔당으로서 (영창대군 죽임 등) 강상(綱常)에 죄를 지은 자들인데, (죽이지 않고) 가볍게 찬축(竄逐: 멀리 귀양 보냄)만 했다. 다행히 은사(恩赦)를 입었으면 인화(仁化)의 안에서 태도를 바꾸어야 마땅한데, 지난번 국사(병자호란)가 위급하던 날 술을 마시며 서로 축하하기까지 했다.”는 혐의로 평북 위원(渭原)에 정배(定配, 1638.4~1639.5)됨.

박종윤 정옹 오익환 박건갑 등 모두 인조반정 후 두 번째 정배임. 박종윤 아버지 장령 소고 박광선(笑皐 朴光先, 1569~1631, 부모: 박정완-창녕조씨, 장인: 함양읍 강칭(姜偁))은 1631년(인조9) 참수됨. 박광선은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 조시일 백부, 조시량 부친)-도계 조정생(陶溪 曺挺生, 조시일 부친, 조시량 삼촌)의 고종 형님임. 즉 박정완은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 대구도호부사, 아들: 조정립·정생)의 자형임.

※사촌형 조시량과 박종윤(朴宗胤, 1594~1645, 박광선 차남)은 1639년(인조17) 5월 정배에서 방송(放送)된 후, 평양서윤에 재직 중이던 조시량 아버지 조정립(57세)을 함께 찾아가 만남. 함께 정배된 정옹 오익환 박건갑 등은 모두 정배지에서 사망했는데, 조시량과 박종윤이 살아남은 건 조정립의 영향력 때문으로 판단됨.

※정인홍 문인인 이조좌랑 박종윤은 계해정변 후 아버지 소고 박광선(笑皐 朴光先, 1562~1631, 장령)과 위리안치되고, 박종윤의 형인 박종주(朴宗冑, 1591~1623, 승지)는 대구 경상감영 남문 밖에서 참수됨. 박광선(朴光先, 처부: 강칭, 처증조: 판서 강현) 매제(매부)인 수찬 오여은(吳汝檼, 1561~1633, 사위: 내암 손자 산음현감 정릉)은 정배돼 죽음.

1631년(인조9) 3월 이른바 2차광해복위사건 때 박종윤 아버지 박광선(朴光先)은 당고개(堂古介)에서 참수, 박종주 아들 박희집(朴禧集)·경집(慶集)은 군기시 앞에서 참수됨. 이때 박종윤은 정배돼 있었기 때문에 화를 입지 않았는데, 국청에서 박종윤 오익환 등도 복위사건에 연루됐다고 하여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했으나 인조가 윤허하지 않았음. 그런데 1638년 4월 박종윤 정옹 박건갑 등 7명이 합천에 모여 “병자호란으로 위급하던 날 술을 마시며 서로 축하하기까지 했다.”는 죄목으로 박종윤이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정배된 것임.

1640년(인조18) 3월 14일: 종5품 함경도사(咸鏡都事) (34세)

-이때 아버지인 공조정랑(工曹正郞, 정5품) 조정생(曺挺生)은 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注官)으로도 임명돼 실록(광해군일기) 편찬에 참여함.

1641년(인조19) 7월 13일: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행(行)형조좌랑(정6품) (3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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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행(行) 예조좌랑(禮曹佐郞, 정6품) 교지(敎旨)다. 1641년(인조19) 12월 26일 임명됐다.

1641년(인조19) 12월 26일: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행(行) 예조좌랑(禮曹佐郞, 정6품) (35세)

-이때 임경업(林慶業)은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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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예조좌랑 조시일(曹時逸)이 받들어 회답을 드립니다. 일본국 대마도 주종벽산(對馬島 州種壁山) 만송원(萬松院) 귀하

살피옵건대 배편으로 지극한 선함(禪椷: 외교문서)을 받았습니다. 매우 위안이 됩니다. 관곡(舘穀)의 법도는 어찌 구례(舊例)를 어기겠습니까. 운반해 온 예물에 대한 답례로 사자(使者) 편에 진상품인 토의(土宜: 토산물)를 대마도 만송원(萬松院, 반쇼인)에 그대로 올려 보냅니다. 사개[来价]-심부름 하는 사람(使价)! 문부(文簿)에 따라 액수나 물품의 수량을 살펴 보고 받아 들이니 아주 다행스럽습니다. 따뜻한 봄기운이 가득하기 바랍니다. 더욱 많은 복을 받으실 줄로 생각되니, 이만 아뢰고 줄입니다. 1642년(인조20) 숭정 15년 2월(崇禎十五年二月)예조좌랑(禮曹佐郎) 조시일(曹時逸)<위 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642년(인조20) 2월: 대마도 만송원(萬松院, 반쇼인)에 보내는 서계(書契: 외교문서)를 작성함. 조시일이 통훈대부 예조좌랑에 있으면서 문장에 능했음. (36세)

-“선편(船便)에 대마도주 서계[禪椷: 외교문서]를 받았으며, 관곡(舘穀: 관아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것)의 의(儀: 법도)는 구례(舊例)에 따라 행하고, 봉진(封進: 밀봉하여 올림) 예물에 대한 답례로 사자(使者) 편에 토의(土宜: 토산물)를 대마도 만송원(萬松院, 반쇼인)에 보낸다.”는 내용임.

1644년(인조22) 2월: 38세로 사망함. 1682년 77세로 별세한 파평윤씨와 상하분으로 합천군 묘산면 산제리 산 69번지에 묘소 있음.

-파평윤씨의 아버지는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 살목마을의 윤정남(尹挺男, 윤을신 막내아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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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부사 도계 조정생장자인 예조좌랑 조시일(曺時逸, 1607~1644) 및 파평윤씨 묘소(상하분)다. 합천군 묘산면 산제리 좌측 능선 산 69번지(15669㎡), 1728년 무신혁명 후 묘갈은 파괴됐다. 근래에 세운 위 비석에는 '통훈대부 행함경도 도사 겸 춘추관 기주관 조공지묘(通訓大夫 行咸鏡道 都事 兼 春秋館 記注官 曺公之墓)-배 숙인 파평윤씨지묘(配 淑人 坡平尹氏之墓)'로 새겨져 있다.

다만, 실록 및 승정원일기에는 조시일이 정5품 기주관(記注官)역임한 적이 없다. 조시일이 1640년(인조18) 3월 14일 종5품 함경도사(咸鏡都事)로 제수됐을 때 아버지 조정생(曺挺生)이 정5품 공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注官)을 겸임했었다.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 조시일 비석에 '記注官'으로 잘못 새긴 것에서, 1728년 무신년 거의(擧義) 실패 후 후손들의 생활상이 어떠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조시일 교지(敎旨)가 후손들이 한 장도 소장하고 있지 않고, 뭉치로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20개가 소장돼 있다는 것도.

1645년(인조23): 아버지 도계 조정생(陶溪 曺挺生, 1585~1645)이 61세에 사망함.

1650년(효종1) 9월 10일: 65세 어머니 고령박씨가 큰며느리 파평윤씨 자녀에게 토지(24두락)와 노비(2명)를 증여함. 즉 손자손녀 구별없이 증여함.

-이때 사촌 형 전적(典籍, 정6품) 조시량(曺時亮)이 증참(證參: 증인)으로, 조시일의 고종 사촌 형인 유학(幼學) 박응형(朴應衡, 1605~1658)이 집필(執筆: 대서인)로 참여하여 수결(手決: 서명)함. 그후 박응형은 조시량의 작은아들(조하현)의 장인이 됨. 박응형 사망 후 조정립(曺挺立, 정주목사, 장자: 조시량)과 조정융(曺挺融, 정선군수, 6촌형: 조정립)이 만사를 지어 추모함.

*위 박응형 맏사위가 상주 청리면의 생원 이재헌(李在憲, 1631~1696, 조하현 손위동서)인데, 이재헌은 1678년(숙종4)“송시열을 1675년(숙종1) 정계에서 축출한 일을 종묘(宗廟)에 고(告)해야 한다.”는 이른바 고묘소(告廟疏)를 올린 인물임. 그의 아들 생원 이인지(李麟至, 1683~1746, 그후 전북 금산군 유배)는 1736년(영조12) 3월 병진상소 때 소두(疏頭)가 돼 “송시열-송준길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비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며, 문묘 종사에 반대한다.”하는 경상좌도 4700여명의 연명 상소를 올린 인물임.

*이재헌 8촌형 이재관(李在寬, 1620~1689)은 부제학 창석 이준(蒼石 李埈, 1560~1635, 형: 이전)의 손자인데, 이재관 손자 진사 이증엽(李增曄, 1674~1742, 이인지 11촌조카)은 조하현(曺夏賢, 부: 양산군수 조시량, 형: 조하전, 손자: 조명좌·희좌·순령)의 둘째사위임. 이증엽은 상주 도남동 도남서원장(道南書院長)을 1727년, 1730년 두번 맡았고, 이재헌(李在憲)은 1692년 도남서원장을 했음.

*위 이인지(李麟至, 1683~1746, 부: 이재헌) 막내사위 신일권(申一權, 1728~1802, 6대조: 대사헌 신식)의 5촌당숙이 1728년(영조4) 3월 무신변란(戊申變亂) 때 충청병사로 추대된 신천영(申天永, ?~1728, 부: 신은(申垽), 10대조: 영의정 신숙주)이다. 충청도에서는 무신변란'신천영의 난'이라고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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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초(脫草)할 수 있는 한학자에게 내가 의뢰하여 번역했다. 1650년(효종1) 9월 10일 조시일 어머니인 고령박씨(1586~1663, 부: 박정번)가 미망인이 된 맏며느리 윤씨(45세)의 자녀, 즉 손자손녀에게 토지(24두락)와 노비(2명)를 증여하는 별급명문(別給明文, 63㎝×48.7㎝)이다. 재산 상속(증여)에 딸-아들 구별이 없다.

좌측 끝(붉은 ) '證參 三寸姪 典籍 曺時亮' 글자는 조시량(48세, 삼촌: 조정생, 4촌동생: 조시일)의 친필이다. 집필(執筆) 유학 박응형(朴應衡, 46세, 고모부: 조정생)은 고령박씨의 오빠(박창선)의 아들이다. 19년 전인 1631년(인조9)에는 사촌 오빠인 전 장령 박광선(朴光先, 1562~1631) 등이 이른바 '광해복위사건'에 연루돼 당고개에서 참수되는 등 친정인 고령 우곡면 도진의 고령박씨 문중이 큰 우환을 겪었다.

그후 고령박씨 조카인 남고 박응형(南皐 朴應衡, 1605~1658, 부친: 박창선, 조부: 박정번)은 조시량(曺時亮)의 작은아들인 조하현(曺夏賢, 1633~1676)을 사위로 삼는다. 박응형은 당시 처한 정치적 상황으로 고뇌하며 방황한 지식인(선비)이었다. 이런 배경도 조성좌·정좌(曺聖佐·鼎佐)1728년 기병(起兵)하는 동인이 됐다. 박응형 외증손자인 조명좌(曺命佐, 부: 조징·曺澂)1728년(영조4) 무신혁명(조성좌의 난) 때 처형되고, 조희좌(曺羲佐, 장인: 회재 이언적의 7세(6대)손 직장 이성중)·순령(舜齡)은 정배된다. <위 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順治七年(庚寅) 九月十日 長子佐郞時逸妻尹氏處 別給文

右文 成置爲臥乎段 家翁下世之明年 同田民乙 七子女處 平均分給後 略干田民除出 以爲余身生前自用之地矣 四五年來 氣力日衰 生死難知乙仍于 同遺漏田民 三男處 平均分給爲遣 代田 則陶谷及心妙兩處 而大小不同 陶谷則二男相議分執 心妙則一男執持爲乎矣 各以自願隨便分執 毋墜余意向事

知谷村前畓七斗落只 勸賓馬位相換畓 二庫幷七斗落只 星山花園田 十斗落只 印

奴大守二所生奴戊寅婢春玉 一所生奴云世

財主 母淑人 朴氏

執筆 三寸姪 幼學 朴應衡

證參 三寸姪 典籍 曺時亮

순치 7년 경인(順治 七年 庚寅: 1650년 효종 1년) 9월 10일 장자(長子)인 좌랑(佐郞) 시일(時逸)의 아내 윤씨(尹氏)에게 특별히 지급하는 문건[명문·明文]

우(右)의 문(文)을 만들어 비치할 것인 데, 가옹(家翁: 집주인, 조정생)이 하세(下世: 별세)한 명년(明年: 내년, 1646년)에 같이 사는 전민(田民: 소작농)을 7명의 자녀에게 골고루 나눠 준 뒤에, 약간의 전민(田民)은 제외하고 내어서 내 생전에 스스로 사용하는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

4, 5년 내에 기력(氣力)은 날로 쇠하니, 생사(生死)를 알기 어려움에 따라 누락된 전민(田民)은 세 명의 아들(주: 시일·시원·시수)에게 골고루 분급(分給)하고, 대전(垈田: 텃밭)은 곧 도곡(陶谷: 묘산면 안성리) 및 심묘(心妙: 묘산면 관기리) 두 곳에 대소(大小)를 같지 않게 준다. 도곡(陶谷)은 곧 이남(二男: 시원·時遠)이 상의하여 분집(分執: 분할해서 가짐)하고 심묘(心妙)는 곧 일남(一男: 시일)이 소유하되, 각자 편의에 따라 나눠 가진다. 절대로 나의 뜻을 어기지 말아라.

지곡촌(知谷村: 봉산면 압곡리 지곡마을) 앞에 있는 논 7두락과, (권빈역참이 있는) 권빈(勸賓: 봉산면 귄빈리) 마위(馬位: 역마를 사육하려고 지급한 토지)의 서로 바꾼 논 등 두 곳을 합한 7두락과 성산(星山: 성주군) 화원(花園: 달성군 화원읍)의 밭 10두락이다. 끝[인·印].

노비 대수(大守) 둘째 소생의 노비와 무인비(戊寅婢) 춘옥(春玉)의 첫째 소생 노비 운세(云世)이다. 끝[인·印].

재주(財主: 소유자): 어머니 숙인 박씨

집필(執筆: 대서인): 3촌 조카 유학 박응형

증참(證參: 증인): 3촌 조카 전적 조시량

1657년(효종8): 조시일 장남 조하양(曺夏良, 1629~1699)이 생원시에 합격함.

1663년(현종4): 어머니 고령박씨(高靈朴氏, 1586~1663)가 78세에 사망함.

♠현재 조시일이 지은 글은 성주의 죽헌 최항경(竹軒 崔恒慶, 1560~1638)을 애도하는 만사(挽詞) 1편이 남아 있음. 최항경은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문집을 간행한 인물이며, 조정립(曺挺立, 정주목사, 조시일 백부)의 장인인 화음 권양(花陰 權瀁, 1555~1618, 현풍현감)과는 사돈지간임. 즉 죽헌 최항경 장자 최은(崔은, 생원)이 권양 둘째 사위임. 맏사위는 조정립임. 또한 죽헌집에는 조시일의 아버지 조정생이 죽헌을 애도하는 만사도 수록돼 있음.

권양 증손이 1728년(영조4) 무신혁명 실패 후 삼가현 장교에게 잡혀 4월 10일 처형된 삼가현 좌수 권만항(權萬恒, 약 60세)임.

*이 블로그 '조성좌 조부인 조하전과 부친 조항 묘소 등' 참조: https://blog.naver.com/antlsguraud/150045902138

(1728년 무신혁명 대장군 휘 聖佐 8세손 曺濽溶)